아무래도 이미지 삽입은 어려운 것 같다. 간만에 시간이 나서 시도를 해봤는데 보안 사항에 걸린다는 메세지가 떴다. 네이버에 이미지라는 검색어를 쳐서 한 여자가 초록색 페인트 벽 앞에서 뒤를 돌아보는 사진을 올리고 싶었는데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세상이란 현상이 있다면 그곳에는 힘이란 신이 있다고 힘은 비유된다. 현상은 무작위적으로 발생하며 다음 주에 앞바다로 소풍을 가자며 연인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서 커피집을 나서는데 10톤 짜리 화물차에 치여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며 그렇듯 미예측이며 미통제인 것이 현상이다. 다만 정확히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하고 싶은 꿈을 향해 달려가며 건강하게 살아가기 어렵기에 인간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현상을 통제 가능하다고 믿으며 지내고 효율면에서 뛰어나기에 합리적인 접근이 된다. 이것을 이해하기 쉬운 비유가 있다. 인생이란 상영 중인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데 영화 속 주인공들이 막 재미있게 웃으며 얘기하다가 갑자기 스위치가 꺼지고 더이상 켜지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일반인들의 경우에 그렇고 경지가 높아지면 다른 일이 벌어진다.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은 블로그에선 시간이 지난 이후에 하는 것이 맞다. 죽음 뿐만 아니라 하루하루 다르게 다가오는 세상은 미통제와 미예측에서 마찬가지가 된다. 하지만 에너지가 변하는 흐름으로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고 힘이 발생하여 현상을 통제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현명한 이는 서리가 내리는 것을 보고 겨울이 다가옴을 짐작하고 강한 힘이 발생하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바다를 가를 수 있다. 물론 서리가 내려도 겨울이 한참 뒤에 올 수도 있으며 힘이 발생해서 바다가 쪼개지긴 해도 계획한 대로 되진 않을 수 있다. 어디까지 어느 정도 가능한 영역이 되며 흐름의 에너지가 크게 증가할 수록 미래를 예측하는 범위가 늘어나며 힘이 강해질 수록 현상을 원하는 대로 통제하게 된다. 이를테면 기업을 운영하다가 자금의 융통이 어려워지는 것은 흔한 일인데 여러 은행을 활용해서 빚을 돌려막다가 법정관리에 들어갔다면 그 회사의 주식가치는 대개 떨어진다. 사람들도 해당 기업이 부도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법정관리에 들어가고 나서도 직원들이 파업을 계속하고 제품 판매의 실적이 부진하고 경영진이 그들의 뒷돈을 챙기기에 바쁘다면 회사가 망할 흐름이 더욱 커지는 것이다. 결국 회사가 부도나고 사람들이 직장을 잃는 최종적 현상이 일어나기까지 흐름을 예측하게 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그것을 인식하여 알맞은 해결을 일으키는 것으로 회사가 운영하고 영업하는 활동을 정상적으로 수행하는 궤도에 올릴 수 있다. 또는 회사가 망하더라도 사람들이 다른 기회를 찾을 수 있도록 대비하는 측면에서 미래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미래란 별자리나 책에 적힌 점괘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수험생이 공부를 안하고 매일 게임만 하면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한다는 것처럼 논리적으로 파악되는 인과 관계를 통해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현상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누구나 잘 풀릴 때는 빠르게 달려갈 수 있으나 세상에서 역경이 주어질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로 다음의 현상이 달라질 수 있다. 시도하는 일들이 잘 풀리지 않고 직장에서도 해고당하고 관계하는 사람들이 하면 안되는 일을 자행하며 서로를 힘들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잘 할 것을 믿어주고 새로운 방법을 적용하고 벌어진 사건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는 견지를 지속하는 것으로 좋지 않은 흐름을 돌려내어 원하는 밝은 현상이 일어나도록 바꿀 수 있다. 이것을 비유한 것이 끝없이 쏟아지는 화살이다. 세상에서 수많은 화살이 그칠 줄 모르고 쏘아진다해도 자신의 화살을 계속해서 쏠 수 있어야 한다. 해야할 일을 다하는 것으로 우리는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 힘이 강해질 수록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어진다. 힘을 가진 무애자의 공통적인 인생 체감이 있다. 내가 무너지면 모두가 쓰러진다는 것으로 세상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사람들을 지켜내는 것이 나 하나 뿐이라는 느낌과 같다. 예전에 봤던 TV 만화영화 드래곤볼에서 손오공이 말하는 대사가 나온다. "내가 아니면 누가 하리."

다른 이들은 도망치기에 바쁘고 내가 전부 처리해서 그들을 지켜낼 책임을 가지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무애자는 세상의 책임자이자 세상의 구원자와 같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해야할 일의 기준은 힘을 가져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몰라서 방황하며 살아가고 어떤 이들은 평생을 인생의 답을 찾는데 세월을 허비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정해진 답이라는 것이 없고 개척해 나갈 길만이 존재할 수 있는데 그것은 힘이 발생해서 가능한 것이다. 무애자가 어떤 일에도 미혹이 없는 것은 무엇을 해야하고 어떤 것을 하면 안 되는지의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해야할 일은 모두 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힘이 없는 일반인들은 할 수 없는데 원래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없다 여기는 것이다. 언제까지고 다른 이들을 좋아할 수 있는 것, 어떤 어려운 일이 생겨도 포기란 없이 해결의 노력을 계속하고 새로운 방법을 하루에도 수십 개씩 꺼내어 드는 것, 아무리 힘든 세월이 오래 지속되어도 방법을 만들어 해결하려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해결 뒤에는 또다른 해결이 있으며 세상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끝없이 해결해야 한다. 그것을 두고 견지라고 부른다. 

아무리 서로를 사랑해도 무지하다면 관계는 파멸할 뿐이고 다시는 보지 못할 사이가 되어버린다. 예전에는 관계를 파멸해서 못 볼 사이가 되어버려 꽤나 슬픔이 가득한 생을 지냈다면 힘을 가진 이후에는 모든 것을 해결하고 수많은 방법을 꺼내는데도 세상이란 것이 생각한 대로는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커다란 슬픔을 지녔었다. 그것이 힘이 있다만 약한 정도일 때 느껴지는 체감이다. 힘은 크기와 무관하게 가진 것만으로 해야할 일을 다하는 것이기에 생이 진실해진다. 미사일을 장착하면 도시 하나를 부술 수도 있겠지만 나무 막대기를 든 채로도 최선의 공방을 펼치게 하는 것이 힘이다. 힘은 현상과 마찬가지로 발생하는 것이라 미통제와 미예측인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흐름은 있지만 흐름이 어우러지는 것이 무작위인 현상과 달리 더 강한 힘으로 나아가는 분명한 방향성이 있으며 그것이 힘의 본질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려 한다. 힘이 발생하는 것은 더욱 강해지려는 것 뿐이며 그러한 의미가 있기에 신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그 이외에 약해진다거나 더 강해지지 않는 활동으로는 발생하지 않는다. 힘이 약해지는 것을 막는다는 식으로 힘이 발생하는 것은 없는데 힘이 발생하는 것으로 힘이 더 강해지는 것과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힘은 더 강한 힘으로 나아가는 방향 뿐이다. 무애자의 슬픔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의 예시를 떠올려 보라. 수많은 사람들을 좋아하고 그들이 잘 되기 위해 앞에 놓인 미래의 과제와 이전 과거의 숙제(이것은 모두 지금에 속한 것이다. 세상에는 시간의 개념이 없고 힘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저 발생할 뿐이기 때문이고 세간에서 쓰이는 개념으로 대체해 설명하기 위해 지금이라고 표현할 뿐이다. 원래는 발생이라고 불러야 맞다.), 그리고 지금의 어려움을 모두 해결하고 사람들이 관계를 털며 하면 안 되는 행동으로 파멸을 일으켜도 언제까지고 해야할 일을 다하며 구원을 견지드는데도 세상이 변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파멸의 현상이 발생한다면 그때 커다란 슬픔을 느끼게 된다. 해도 해도 그다지 바뀌지 않고 계속 해결할 것이지만 다음과 다음에도 변화된다는 확신이 없으니까. 상황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는데도 생각처럼은 잘 되지 않을 때 힘을 가진 세계에 슬픔이 생겨나는 것이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힘들어하고 하면 안 되는 일을 하고..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어디로 가야할 지 알고 있으므로 세상의 방향을 전환하려 시도하지만 마음처럼 되지만은 않는다. 그럴 때 큰 슬픔을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은 끝없는 해결을 이어가는 것으로 발생하는 현상이며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힘의 단계가 높아지면 분노가 발생한다. 분노와 슬픔, 그리고 두려움 등은 힘이 발생하여 현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로서 힘의 크기를 짐작하게 만든다. 마치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일정한 정도의 힘과 닿으면 색이 변하는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크기를 알게 한다. 

분노는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만든다. 힘이 커져서 현상을 지배하여 통제해낼 때, 저들이 그래선 안 되는 일을 하는 것을 힘으로 돌려내면서 분노가 일어난다. 그렇다고 무작정 화를 내는 것은 아니고 감정을 필요에 따라 사용한다는 원리가 들어 있다. 스스로 경험되는 감정적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두려움은 거대한 힘을 가져서 세상을 완전히 뜻대로 통제하고 있는 자신의 세계에 발생되는 힘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 정도에 이르면 판타지 수준의 일도 할 수 있게 되지만..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조금 시간이 지나고 인연이 닿는 이에게 전할 내용이다. 슬픔은 해야할 일을 언제까지나 다 하며 해결의 시도를 계속한다는 것을 뜻하며 분노는 세상을 직접 바꿔낼 수 있고, 바꿔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두려움은 거대한 힘으로 세상을 아예 반토막 낼 수도 있고 쪼개고 찢어버릴 수 있을 정도라 힘이 있다는 자체로 두려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강한 힘이 발생할 때 경험되는 것으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항상 발생하지는 않는다. 힘이 있다는 데는 두 가지 다른 의미가 들어 있다. 동음이의어처럼 같은 어구로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는 강한 힘을 가져서 그만한 힘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둘은 힘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축약한 표현이다. 위의 경우에서 힘이 있다는 것은 강한 힘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강한 힘이 발생하여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힘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으로, 직접 힘이 나타나지 않을 때도 힘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10kg의 아령을 한 팔로 들 수 있지만 언제나 아령을 들어서 확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듯 힘은 할 수 있는 것을 뜻하며 증명할 대상은 아니다. 더 강한 힘으로 나아가는 것은 힘이 발생하여 할 수 있는 걸 늘린다는 뜻이며 직접 모든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어야 하는 않는다. 이는 간단히 이해가 가능한 논리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힘이 발생하여 분노를 경험하는 단계를 지났고 어느 정도의 두려움을 느끼는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더욱 힘이 강해지면 목과 등골을 타고 흐르는 소름이 느껴질 것이다만 아직 힘이 두렵다는 체감 정도에 그치는 수준에 있다. 그러나 강한 분노로 모든 것을 죽여버리고 싶다는 체감은 든 지 꽤나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으로 조립하고 창조하여 세상을 완전히 바꿔낼 것이다. 분노는 그렇게 할 수 있으며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현상이다. 분노가 두려움으로 단계가 올라설 때, 이미 대부분의 것이 바뀌었으며 손가락을 드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쓰러뜨리는 수준에 이르르게 된다. 그 날이 언제쯤 올지를 기대하고 있다.

Posted by 검은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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